음식 이야기

냉면의 계절 … 햇메밀·동치미 제맛

오드리튜튜 2007. 9. 21. 14:31

냉면의 계절 … 햇메밀·동치미 제맛

"살얼음이 동동 뜬 냉면은 칼바람이 부는 한겨울에 먹어야 제맛이야."이화여자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이종미(64)교수는 뜨거운 여름보다 추운 겨울철에 냉면을 더 자주 먹는다.

살얼음 얘기부터 꺼낸 데서 알 수 있듯 이 교수가 말하는 냉면이란 요즘 젊은이들이 즐겨 먹는 맵고 달고 시고 짠 자극적 맛의 비빔냉면이 아니다. 흔히 물냉면이라 하는 평양냉면을 뜻한다. 끈기 없는 메밀가루로 면을 뽑아 치아가 좋지 않아도 불편 없이 먹을 수 있는 바로 그 평양냉면 말이다.

"맞아, 평양냉면을 말하는 거지. 지금은 한반도 어디를 가도 먹을 수 있는 '전국구 냉면'이 됐지만 한 세대 전만 해도 평양냉면은 평안도 지방의 전통적 겨울 음식이었어요."이 교수가 안 그래도 찬 겨울에 더 찬 평양냉면을 즐기는 이유는 사랑을 듬뿍 주셨던 외할머니의 고향 맛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먹던 어릴 적 추억이 새삼스러워서만도 아니다. 이열치열의 반대 개념인 이한치한은 더더욱 아닐 말씀. 평양냉면이 겨울에 더 맛있을 수밖에 없는 과학적 근거가 있어서란다.

"밀가루보다 메밀이 흔한 평안도에선 겨울이면 집집마다 국수틀을 갖춰놓고 메밀가루로 면을 뽑아 냉면을 만들어 먹었어요. 평상시에는 흔한 동치미 국물에 말아먹고, 잔치 땐 꿩이나 돼지를 잡아 육수를 내 말아냈고. 여기에 중요한 게 바로 메밀과 동치미예요."이 교수가 메밀을 꼽는 이유는 겨울이면 갓 수확한 햇메밀로 면을 뽑았기 때문이다. 메밀은 시간이 흐를수록 고유의 풍미가 약해진다. 햇메밀은 끈기가 있어 다른 가루를 섞지 않고도 면을 뽑을 수 있다. 게다가 햇메밀가루로 뽑은 면은 푸른빛이 돌아 보는 맛도 좋다. 거친 부분도 있지만 면 자체가 부드러우면서도 구수한 풍미를 낸다.

평양냉면의 제철이 겨울인 것은 육수의 기본이 되는 동치미가 겨울 김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치미는 찬 공기 속에서 서서히 발효돼야 탄산미가 살아난다. 잘 담근 동치미의 국물 맛은 청량 가공음료인 사이다보다 톡 쏘는 맛이 강하다. 구수한 햇메밀로 뽑은 면과 차갑게 잘 익은 동치미 국물이 만났으니 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도 겨울철에 평양냉면을 먹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택시 뒷자리에 앉아 냉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벌써 서울 잠원동 본가 평양면옥 앞. 본가 평양면옥은 평양냉면집의 대표 격으로 꼽히는 의정부 평양면옥이 최근 문을 연 곳이다. 제육 한 접시와 평양냉면을 주문한 뒤 이 교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평양냉면을 먹기 전에는 돼지고기에 소주 한잔 하는 게 기본이지. 그래서 '선주후면(先酒後麵.술을 마시고 냉면을 먹는다는 뜻)'이란 말이 생겨난 거예요. 참! 평양냉면의 매력은 심심함에 있어.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요즘 신세대들은 맛이 없다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막상 평양냉면의 깊은 맛을 알고 나면 맹렬한 매니어가 되더라고."이 교수는 냉면이 나오자 먼저 대접을 들고 시원하게 육수부터 들이켠다.

"평양냉면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 있어. 우선 육수 맛을 충분히 음미하는 거야. 그 다음엔 면을 입에 넣고 구수한 향을 맛보는 거지. 그러자면 입 안에 침이 고일 때까지 씹고 또 씹어야 해. 그런 뒤 면에 식초를 뿌리고 겨자를 풀어서 먹어야 냉면의 참맛을 느낄 수 있어요."메밀 면은 금방 퍼지기 때문에 그때그때 반죽하고 면을 뽑고 삶아야 하는 등 손이 많이 간다. 고깃국물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고 동치미 국물과 섞는 비율을 맞추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이 교수는 평양냉면을 먹을 땐 정직하게 면을 말아내는 몇몇 전문점만 찾는다고 한다.

의정부 평양면옥(031-877-2282)과 을지면옥(02-2266-7052), 필동면옥(02-2266-2611)은 삼남매가 각각 운영하는 평양냉면집이다. 의정부는 오빠가, 필동면옥과 을지면옥은 자매가 주인이다. 의정부 평양면옥의 홍진권 사장이 지난달 서울 잠원동에 추가로 문을 연 곳이 본가 평양면옥(02-547-6947)이다. 전체적으로 면발이 가늘고 투명하다. 메밀향이 강하면서도 면이 뚝뚝 끊어지지 않고 씹는 맛이 있다. 육수는 평양냉면답게 역시 심심하고 밍밍한 편이다. 맑은 육수 국물 위에 고춧가루를 뿌려 내는 게 특징이다. 꾸미로 올려진 무와 반찬으로 나오는 무김치가 연하면서 맛나다. 입가심용 물로 면을 삶아낸 '면수'를 준다. 값은 의정부 평양면옥만 6500원, 나머지는 7000원이다.

주교동 우래옥(02-2265-0151)은 동치미를 쓰지 않고 쇠고기로 우려낸 맑은 육수에 말아 낸다. 메밀가루에 전분을 섞어 면을 끊는 맛이 있다. 냉면이 먹고 싶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 중 하나다. 값은 8500원. 종로 한일관(02-732-3735)은 육수 맛이 항상 일정해 매력 있다. 전반적으로 정갈하고 품위 있는 맛으로 8000원. 양평의 옥천냉면(031-772-9693)은 서울을 벗어나 가볼 만한 곳이다. 면발이 굵고 돼지고기를 삶아 만든 육수가 특징이다. 한 그릇에 5000원.

평양냉면 영양 백서

평양냉면의 주원료인 메밀은 단백질이 12~14%로 다른 곡류보다 많다. 쌀에 부족한 리신이 많고 철분 등 비타민 복합체가 많이 들어 있다. 뇌출혈 예방 효과가 있는 루틴의 함유량도 많다. 루틴은 국수를 삶을 때 상당량 녹아 나오므로 삶은 물(면수)을 마셔서 챙겨야 한다. 냉면은 숙취 푸는 효과가 뛰어나 술 마신 뒤 속풀이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영양성에 비해 칼로리가 적어 다이어트식으로도 그만이다. 냉면에 꾸미로 올리는 삶은 계란 반쪽은 냉면만으로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해주고 메밀로부터 위벽을 보호해준다. 냉면에 치는 겨자와 식초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더운 성질의 겨자를 통해 냉면의 찬 기운을 중화하고, 식초로 대장균을 죽이는 등 조상들의 위생적인 지혜가 가미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