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교육이야기

훈육이야기 - 아동교육8

오드리튜튜 2007. 11. 9. 01:41


8. 뿌리의식을 심어 주고

1)조국의 뿌리

우리들은 흔히, 반만년 역사를 이오 오고 있는 백의민족 또는 단일민족이라고 일컬어진다. 우리 나라 국민들은 타고난 민족성이 순수하여 다른 나라로부터 침략은 받았을지언정 먼저 침략한 역사는 없다고 자부한다.

우리 나라 최초의 부족국가였던 고조선은, 단군황검을 정치적으로는 군장으로 하고 종교적으로는 제사장으로 하는 제정일치의 부족국가였다. 일찍이 중국의 주나라와 국교를 맺어 상호 내왕하였으며 BC4세기 경에는 전국칠웅의 하나인 연나라와 대립하면서 동방의 종주국으로 등장하였다. 고조선 사회의 발전은 중국왕조의 변천 및 주변국가의 변화와 연관을 가지면서 이루어졌는데 우리 민족의 시조요 우리 나라의 국조로 받들어지는 단군왕검은 천제인 환인의 손자이며 환웅의 아들이다. BC 2333년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조선을 개국하였다.

한편 단군신화는 일종의 건국신화, 개국신화로서 우리 민족이 외세로부터 침략을 당하는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민족의 단합을 일깨워 주는 구심체 역할을 해 왔으며 드디어 단군신앙으로까지 발전되었는데 유교, 불교, 도교 등이 전해지기 전부터 내려온 단군신앙은 국난이 있을 때마다 민족의 힘을 하나로 모아 자주성을 지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삼국유사).

대한제국 말기에 일어난 대종교는 단군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대표적인 종교단체이다. 이 외에 여러 학술사회단체가 단군의 통치이념인 홍익인간의 정신을 받들어가고 있으며 매년 10월 3일 개천절에는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하여 단군사상의 높은 뜻을 기리고 있다.

한편 정부에서도 거국적으로 기념행사를 해 나가고 있으며 사단법인 현정회에서는 종로구 사직동 소재 사직공원 내에 단군성전을 마련하고 성조께서 개국하신 10월 3일 개천절과, 세사를 마치고 다시 하늘로 오르신 3월 15일 어천절을 지켜 춘추로 2회의 대제를 매년 올리고 우리 얼을 되살리는 강연회 등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국민들이 이에 동참하지 아니하고 단군신앙을 타부시하는 경향이 있음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이해시키고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이와 관련돈 유적지를 견학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어디 그 뿐이랴. 우리 서울 부근만 하더라도 우리 나라의 뿌리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장소는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된다.
암사동 선사 주거지에는 옛날 선사시대의 빗살무늬 토기와 민무늬 토기, 그리고 주거지가 확인되어 그 유물을 보존 관리하고 있으며 서초구 양재동 소재 "시민의 숲"에는, 일본군의 상하이 사변 전승기념식을 하는 홍구공원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구 고위 간부들을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꽃다운 청춘에 순국한 독립운동가 윤봉길(1908-1932)의사를 추모하는 뜻에서 국내 유수한 독지가들의 협조와 기념사업회의 주관으로 동상을 세우고 더불어 기념관을 건립하여 생전에 사용하던 유품과 기록들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기념관 앞 청동흉상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윤의사 어록이 새겨져 있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한층 강의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정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라고 쓰여져 있으니, 그의 독립운동 정신을 다짐하는 뜻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비문에는 "영웅과 성인군자는 살아서 명예가 있지만 의사는 죽어서 말한다. 매헌 윤봉길을 의사로 흠모하는 뜻이 거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작동 노량진에 사육신묘역이 있는데 여기는 어떤 곳인가?조선조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는 계략을 세워, 1453년(단종1년) 계유정난을 통하여 등극하니 이가 바로 조선조 제 7대 임금인 세조이다. 그러나 여섯 명의 충신이 이에 굴하지 않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악형을 받아 목숨을 바쳤으며, 사육신묘역은 바로 이들의 충절을 추모하는 성지이다. 세조의 고문과 회유에 끝내 굴복하지 않았던 박팽년은 옥에서 죽었고 유성원은 자결하였으며 그외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응부는 처형되었다. 그후 1691년(숙종17)에는 관직이 복구되고 시호가 내려졌으며 1782년(정종6)에는 신도비가 세워졌다. 이들 사육신 가운데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응부의 묘만이 있었으나 1977년 정화사업을 하면서 하위지, 유성원의 가묘를 만들고 입구에는 사당을 건립하여 그 숭고한 불사이군의 충절을 기리고 있으니 이 곳 또한 자라나는 세대들의 배움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공원에는 독립문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1896년 서재필이 중심이 된 독립협회가, 우리의 독립정신을 찬양하고 영구독립을 선언하기 위하여 당초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 자리에 세운 것으로, 1979년 금화터널 공사로 인하여 종래 있던 자리에서 북서쪽으로 80미터 떨어진 현재의 위치로 이전 복원되었다(사적 제32호). 또한 서대문 형무소를 이전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의 형장은 원형대로 보전하였으니 이 곳도 뿌리를 인식하는 우리 2세들의 현장 실습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종로구 종로 3가에 소재한 종묘공원에는 조선의 선비정신과 개화정신을 함께 구현한 인물로 구한말 일제치하에서 민족의 진로를 개척하는 데 앞장선 선각자이자 민족의 스승이었던 월남 이상재(1850-1927)선생의 동상이 있다. 이상재 선생은 서재필, 윤치호 등과 더불어 독립협회 창설과 독립신문 발간에 참여했고 조선일보 사장으로 언론창달에 공헌했으며 신간회 회장을 맡아 민족의 한뜻을 마련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27년 세상을 떠나셨는바 이를 기리고자 한 것이다.

종로구 종로 2가에 있는 탑골공원은 고려시대 흥복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세조가 원각사로 개칭하고 중건하였으나 중종9년(1514) 원각사는 철거되고 원각사비와 10층 석탑만 남아있다. 이 곳에는 독립운동가이자 천도교 교주로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하였던 의암 손병희(1861-1922)선생을 기리는 동상이 공원중심부에 건립되어 있고, 우측 담 부근에는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조국독립을 위하여 헌신하였고 또한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자는 '불교유신론'을저술하였으며 한편 시인으로서 '님의 침묵'을 출간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던 만해 한용운(1879-1944)선생을 기리는 찬양비가 있으니 구구절절 읽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그 중에 한시절구가 있으니 새겨 보면 다음과 같다.

사나이 가는 곳이 고향이거늘
객지에 오래 있어 고생하는 이 얼마인가
한소리 크게 질러 온 세상을 울리니
눈 속의 복사꽃도 조각조각 붉어오네

선생의 호연지기가 돋보이는 장엄한 시귀이다. 한용운 선생의 찬양비 바로 옆에는 종로 3가 쪽(피카디리 극장)으로 나가는 출입문이 있는데 그 문 옆에서부터 좌측 타원형으로 담길을 따라가면 단기 4300년 12월 월탄 박종화 선생이 지은 '3.1정신 찬양비'가 서있고 이어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3.1독립운동을 전개한 내용을 그림으로 조각하여 건립하고 그 조각마다 내용을 설명한 조그만 비문이 10개소요, 마지막으로 탑골(파고다)공원 사적비를 세운 바, 단기 4300년 12월 노산 이은상 선생이 글을 짓고 일중 김충현 선생이 썼는데 그 당시 서울특별시장 김현옥과 종로구청장 김만규가 주관하였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여기에 그 내용을 적어보고자 한다.

삼일정신 찬양비

젊은이들이여 보라 한국의 지성 높은 젊은이들이여 정의와 자유를 수호하는 이 나라의 주춧돌인 청년학생들이여 이 곳에 걸음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어 고요히 주위를 살피고 둘러 보라. 민족자결의 고함치는 독립만세소리 그대의 귀에 쟁쟁하리라. 추상열일 같은 천고의 의기가 그대의 가슴에 용솟음 치리라. 아아! 젊은이들이여 이 땅을 길이 길이 수호하여 자손만대에 영원히 간직하라 이곳은1919년 3월 1일 그대들의 선배 젊은이들이 일본인 총독의 총칼 아래 희고 푸른 민족정기를 무지개같이 창공에 뿜어 33인의 지도자와 함께 인간의 자유와 국가의 독립을 정정당당하게 선포하고 민족자결을 외쳤던 3.1민족운동의 성스러운 발상지다. 자주독립을 선포한 젊은이들은 맨주먹 빈손으로 고함치며 거리로 내달렸다. 남녀노소 국민들은 뒤를 받쳐 성난 물결같이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불러 하늘 땅을 뒤엎었다. 백수항전의 흰 물결, 아아! 자유아니면 죽음을 달라 민족자결의 고함소리에 백두산도 우쭐대고 동해물도 끓었어라 일경도 넋을 잃고 총독도 떨었어라 한식경 뒤에야 일병은 비로소 총칼을 들고 우리들을 쏘고 찔렀다. 비웃두룸 엮듯 감옥으로 묶어 갔다. 피 흘려 쓰러진 이 거리마다 즐비했네 아아! 거룩한 한민족의 백수항전이여 탑골공원의 봉화가 서울 장안에 높이 들려지니 삼천리강산 방방곡곡엔 산마다 봉화요 동리마다 불바다였다. 1년을 끌어온 팔도강산의 3.1만세 대 정신운동은 온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일제감옥에 투옥된 이 46,900여명이요 총칼에 쓰러져 죽어간 이 7,509명이요 상한 이가 15,091명이었다. 아아! 세계민족 사상에 그 유례가 없는 일치단결된 대 민족운동이요 만고에 없는 민족의 서사시다. 오늘날 국가의 광복은 이 성스러운 민족운동의 결실이라 하겠다. 아아! 젊은이들이여 이 정신을 이 땅과 함께 길이 간직하리라. 단군기원 4300년 12월 박종화 짓고 김충현 쓰다.

이렇게 되어 있다. 계속해서 첫 번째 그림조각부터 열 번째까지의 그림조각 설명내용을 적어 보고 마지막으로 탑골공원 사적비 내용을 적어 보고자 한다. 단군기원 4300년은 서기로는 1967년이 된다.1919년 3월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는 수천명 학생들이 정재용의 선언서 낭독이 끝난 뒤 대한독립만세를 드높이 외치며 거리로 달려나가서 서울은 순식간에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고 그대로 파도와 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1919년 3월 2일 함경도 함흥 고을 민중들은 역사 깊은 만세교위를 달리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 중에서도 조영신이란 소년의 입을 찢었을 적에 더욱더 거센 만세 소리는 천지를 흔들었다.

1919년 3월 1일 정오 평양 기독교 신자들은 종소리가 울리자 당댓재 예배당으로 모여 들었다. 고종황제 추도식을 마치고 이어 거리로 달려나가 천도교인들과도 합세하여 태극기를 들고 왜경의 총탄을 무릅 Tm고 만세 시위를 했다.

1919년 3월 10일 오후 황해도 해주에서는 문월선 등 기생들이 선봉이 되어 만세시위를 하자 잔악한 기마 경찰관들은 우리 민중을 마구 짓밟고 여자의 머리채를 말꼬리에 잡아매어 끌었지마는 그들은 왜경 앞에 조금도 굴하지 아니했다.

1919년 3월 10일 강원도 철원 고을 민중들은 학생들을 선두로 태극기를 들고 몰려나와 독립만세를 높히 외쳤다. 악독한 왜경들은 총을 마구 쏘며 칼을 휘둘렀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행진할 뿐이었다.

1919년 4월 15일 오후 일본군 1개 소대가 수원 제암리에서 예수교인들과 천도교인들을 교회당에 몰아넣고 총으로 난자하여 불을 질렀다. 불을 피해 나오는 부인을 칼로써 잔인하게 죽이고 창문으로 내어 보내는 아기들 마저 죽였다.

1919년 3월 1일 천안 고을 병천시장에 수천명 군중이 독립선언식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주모자 유중천 등 20여명은 현장에서 참살되고 유관순 처녀는 일경에 체포되어 감옥으로 넘어가 혹독한 고문에 항쟁하다가 마침내 옥사하였다.

1919년 3월 23일 경상남도 진주에서는 기생 수백명이 만세를 부르며 남강가를 행진했다. 일본경찰들과 헌병들이 총검을 들고 찌르려 했으나 그들은 아우성 치며 우리는 논개의 후신이라 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앞으로 용감히 달려갔다.
1919년 4월 3일 남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수천명 군민들이 질서정연하게 만세를 부르다가 방모씨 등 10여명이 일본 경찰의 칼 아래 쓰러지자 그의 아내와 어머니마저 달려와 거기서 자결하며 독립을 이루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1919년 3월 23일 저 멀리 제주도에서도 남녀군중과 학생들이 함께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 한라산 정기를 타고난 그들은 맨손으로 달려나가 일본경찰의 무서운 총칼과 싸워 피를 흘리면서도 행진을 계속하며 한 사람도 굽힘이 없었다.

탑골공원 사적비

역사가 길면 곳곳에 이야기가 많은 법이니 탑골공원이 바로 그 중의 하나다. 본시 이조 태조 때에는 여기에 불교 조계종의 본사이던 흥복사가 있었는데 그것이 세종 때에는 관습도감 예장도감 및 동학 유생집회소 등이 되었더니 세조 9년에 왕이 효령대군의 신앙심에 감격하고 또 스스로도 뜻을 일으켜 여기 있던 관청들은 모두 딴 곳으로 내어 보내고 민가 200여호를 더 사들여 도장을 널리 닦고 옛 터에 새 절을 다시 이룩하니 그것이 바로 원각사이었다. 13층탑과 대원각사비를 세우는 등 큰 규모에 융성한 모습이 장관이더니 연산조 때에 이르러서는 불교 배척과 함께 연방원을 만들어 기악을 다루었으며 중종때 훼철되고 임진난을 겪은 뒤 300년 동안 무질서한 마을이 되었던 바 1897년 한성부 판윤 이채연과 탁지부 고문 영국인 부라운의 협력 아래 내부토목국장 남궁억이 길을 넓히고 공원을 처음 만든 지 70년이 되었다. 비록 옛날 원각사 터를 다 들여오지 못하고 범위는 극히 좁아졌다 할지라도 보물로 끼쳐 오는 탑을 중심으로 공원을 만들어 탑골공원이라 불러오더니 1919. 3.1독립만세운동 때 여기서 의지의 함성을 처음 울린 뒤, 이 곳은 비로소 민족의 마음의 고향이 되어 실로 성지와 같이 되어 온 곳이다. 일제의 암흑시대에는 짐짓 거칠게 했고 해방후에도 무심하게 버린 바 되어 아침저녁 이 을 지나는 이들이 공원답지 못함을 탄식하지 않는 이 없더니 서울특별시장 김현옥과 종로구청장 김만규의 주관 아래 새 계획을 세우고 한국정취 풍기는 새 화원을 꾸미고 정신을 밝혀 주는 정결하고도 거룩한 지역을 만들었거니 이리로 들어와 거니는 이는 새 힘을 얻어 흐뭇한 웃음을 웃고 가리라. 단군기원 4300년 12월 이은상 글 김충현 글씨.

이 나라에 어른된 자들이여, 자녀들의 손을 잡고 이곳 성지 탑골공원에 나와 경건한 마음으로 위대한 선열들에 대하여 묵념하고 빛나는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자. 삼일정신 찬양비를 함께 읽어보고 10개로 이루어진 조각된 그림을 관람해 보자. 당시의 독립운동을 양상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고 표현하였으니 이는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거국적인 대민족운동이 아닐 수 없다. 그 운동에는 남녀의 가림이 없었고 노소의 분별이 없었으며 직업의 귀천이 없었다. 늙은이도 젊은이도 순진하기만 했던 남녀 학생들도 참여했으며 왜인의 시중을 들던 기생들까지도 참여하지 않았던가? 이와 같이위대한 우리의 선열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존재해 나간다는 것을 일깨워 주자. 조국이 무엇이고 민족이 무엇인가를 기성세대들이 먼저 깨닫고 또한 우리 후세들을 일깨워 주자
2) 조상의 뿌리

사람은 부모로부터 몸과 터럭과 피부를 물려받은 유형체이다. 그러면 부모는 누구로부터 그와 같은 유형체를 물려 받았을까?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부모의 부모 즉, 조부모로부터 물려받았으며 조부모는 또 조부모의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고 조부모의 어머니는 또 그 윗대로부터 물려받았다. 이렇게 하여 위로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본인과 5대조 6대조 7대조로 결국은 한 씨족의 시조할아버지와 만나게 된다. 그러면 이와 같은 한 할아버지로부터 오랜 기간 동안 면면히 이어 온 내력을 무엇을 통하여 확인하고 알아볼 수 있을까?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족보가 될 것이다.

세계적인 대사건들을 기록한 것이 세계사요, 국가의 크고 작은 일들을 기록 유지하는 것은 국사이며 한 씨족의 내력을 기록한 것은 가계사 즉 족보가 될 것이다. 시조 할아버지부터 현재에 이르는 모든 후손들을 기록한 것을 대동보라 하고 본인을 기준으로 직계만을 기록한 것을 가승보 또는 파보라고 한다. 씨족에 따라서는 가승보나 파보를 족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하튼 족보는 한 씨족의 사건들을 기록해 놓은 개인의 역사이며 뿌리를 인식시키는 보감이다. 족보에는 어떤 성씨가 이룩하게 된 설화와 같은 전기가 실려 있으며 가문을 빛낸 선조들의 비문 행장, 시호 등이 기록되어 있고 조상의 묘를 표시한 산세도가 있다. 보편적으로 출생한 시일과 사망한 시일이 기록되어 있고 관직이 있으면 그 직함을 기재한다. 성년이 되어 결혼을 하였으면 남자의 경우는 처가쪽의 관향과 처의 부, 조부, 증조부의 이름이 등재되고 처의 외조부모, 외증조부까지 등재하는 씨족도 있다. 처의 이름은 등재하지 않은 것이 상례였으나 요즘에는 처의 이름도 등재하는 씨족이 늘고 있다. 옛날에는 결혼을 하지 않은 경우에 여자는 족보에 올릴 수가 없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보며 요즘 족보는 미성년의 여자라도 등재하는 씨족이 많다. 그리고 훌륭한 선비나 관직에 있으면서 문집이 있는 경우 그 문집명을 등재하고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여 정려가 세워졌다든지 증직 등이 부여되었을 때도 그 내용을 등재한다.

족보를 관심있게 살피다 보면 아주 흥미있는 사건들에 접하게 된다. 예를 들면 필자의 선조 건은 성우계 혼의 문인이요, 방조인 호익(유학자)은 진성, 퇴계 이황의 문인임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조선시대 중엽 성종 때 왕동정치와 지치주의를 주창한 한양 조광조의 5대조 휘 인벽은 시호가 양열공인데 처남이 이성계(태조)이나 불사이군의 의를 지켜 나서지 아니하고 양양으로 피신하여 자손과 후학을 가르치면서 절개를 지켰다(한양조씨 대동보). 성리학과 예학 등을 공부하고 아울러 붕당의 심화를 경계하여 황극태평론을 폈던 박세채(1631-1695)는 호를 남계 혹은 현석이라고 하며 시호는 문순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는 평산 신씨에 장가들었는 바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대제학,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했고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세자를 모시고 전주로 피난했다가 돌아와 영의정이 된 상촌 신흠을 외숙으로 두었다. 그는 청음 김상헌의 제자이며 주자학을 비판했던 서계 박세당(1627-1710)과는 사촌간이다(남계 선생 연보 및 한국인의 족보 참조).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뿌리를 중요시하는 가족전통을 가지고 있는 문화민족이다. 그런데 유구한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는 나무의 뿌리는 돌보지 아니하고 나뭇가지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그 꽃만을 아름답게 여기고 보호하는 어리석음에 도취되어 있다. 이제부터 우리들은 뿌리를 찾는 문화를 발달시켜야 하겠다. 흙 속에 파묻힌 보이지 않는 뿌리를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비료를 뿌리고 밑거름을 묻어주고 때로는 언저리를 밟아 주어야 한다. 그러한 나무에 핀 꽃은 오래도록 시들지 아니하며 좋은 꽃을 피워 향기를 내고 마침내는 열매를 맺어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뿌리를 찾아 면면히 혈통을 이어주도록 각고의 정을 세습시킨 것은 선조들의 덕택인 것이다. 선조들의 거룩한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 위해서는 족보를 펴보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족보는 단순한 책이 아니다. 훌륭한 가정을 만들어 주는 뿌리이다. 뿌리가 없거나 있어도 신통스럽지 않으면 민족이나 국가는 결코 건전하지 못하듯이 가정도 똑같은 이치일 것이다. 수많은 외적의 침입을 받고서도 견뎌낸 우리의 끈질긴 생명력은, 바로 뿌리 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2000년 간이나 이곳저곳으로 방황했으나 그 뿌리를 잊지 않아 다시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미국은 청교도 정신과 자유사상을 뿌리로 삼아 자꾸 북돋우고 밑거름을 주고 아름답게 보존하여 지금까지 세계 굴지의 강대국으로 발전해 왔다.

일본 역시 서양문명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자기네들의 고유습관인 집단정신을 기반으로 삼았다. 영국, 프랑스, 독일, 호주 등 서양문화권에서는 족보를 통속적으로 family tree, 즉 '가족나무'란 뜻으로 표현하여 중요시하고 있다. 한국 족보 도서관(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2동)이 지난 81년 개관했는데 그 동안 10만여 명이 이곳을 방문하여 자기의 뿌리(조상)를 찾고 잃었던 족보를 새롭게 만들었다.
국내 첫 족보도서관인 한국족보도서관은 이름에 걸맞게 35,000권의 족보를 소장하고 있다. 우리 나라 성씨의 계보역사 보훈문건도 갖추고 있어 '성씨의 고향'을 방불케 한다. 한국족보도서관의 추정에 따르면 우리 나라 사람 중 2천만 명이 본관을 틀리게 사용하거나 잘못된 성씨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바른 혈통 찾기 운동'도 벌여 지금까지 1만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족보를 바로 잡아 주었다. 이 도서관은 현재 258개 성씨의 족보를 구비하고 있어 전국 성씨의 80%를 커버하고 있다.

92년부터는 중국 연변 천지컴퓨터공사와 함께 족보전산화 작업을 추진, 누구나 손쉽게 족보를 열람하고 조상을 자랑할 수 있도록 작업을 해오고 있으며 앞으로는 모든 씨족의 족보를 CD-ROM화하고 젊은 세대들을 위한 족보의 한글화 작업도 구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미국의 뿌리 존중의식에 대하여 언급한 바가 있다. 그런데 요즈음 미국사회 50대들의 족보연구에 열풍이 불고 있으며 그 숫자가 수천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약 20년 전 앨릭스 해일리의 소설 및 TV 드라마 '뿌리'가 히트하면서 한때 붐을 이뤘다가 시들해졌던 '뿌리찾기'에 다시 뜨거운 관심이 쏠리고 있다는 것이다.

인구통계 잡지인 '아메리칸 데모그래픽스 매거진'은 현재 자신의 가계와 혈통을 추적하고 있는 미국인이 4천 200만 명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전국 족보연구회의 회원은 지난해에만 20%가 증가, 1만 7천 2백 명으로 불어났으며 워싱턴의 국가공문서 보관소 방문객의 60%가 족보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통계도 있다. 그래서 지역, 연대별로 출생, 사망, 인구조사 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공문서 보관소 400호실은 뿌리를 찾는 사람들로 붐빈다고 한다. 족보연구가 다시 활발해진 이유는 베이비 붐 세대가 50대로 접어들면서 여기에 높은 관심을 보이기 때문이다. 또 베일 속의 조상을 찾아 다니는 과정 자체가, 난이도가 높은 낱말 맞추기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많은 흥미를 제공하는 것도 한 요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여기다 컴퓨터 및 정보통신의 발달로 많은 뿌리찾기용 프로그램이 출시된 것도 추적붐조성에 한 몫을 하고 있다. 인터넷에는 관련 웹 사이트가 1만 5천여 개나 있다.

셜리 월콕스 족보연구 회장은 '족보찾기가 미국인들의 정체성을 함양하고 가족간의 유대감을 돈독하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1997. 8.17. 중앙일보 뉴욕 특파원 김동균). 조상의 뿌리를 인식함으로써, 부모를 공경하고 자기자신의 위치와 앞으로의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데 착오가 없을 것이다. 경서에도 '황금 만 량이 자식에게 한 권의 좋은 책을 가르치느니만 못하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자기 씨족의 역사를 기록한 한 권의 족보가 뿌리를 인식하고 자신들을 수양하는 근본이 될 것이다.

조선조의 성군이신 세종대왕께서는 일찍이 권제, 정인지, 안지 등 글 잘하는 신하들에게 명하여 이미 세상을 떠난 6대조 휘 안사를 찬양 추존하여 목조라 하고 5대조 휘 행리를 찬양 추존하여 익조라 하고 고조, 휘 춘을 찬양 추존하여 도조라 하고 증조, 휘 자춘을 찬양 추존하여 환조라 하였으며 조선왕조를 건국한 할아버지 태조와 아버지 태종을 찬양하는 노래를 짓도록 하였으니 그것이 유명한 '용비어천가'이다. 왕조를 개창한 것이 조상들의 음덕이라 생각하고 왕위에 오르지도 아니한 조상들을 왕으로 추존하여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을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내용 등등 125장을 지어 노래를 부르도록 하였으니 조상을 위하는 마음이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은 목은 이색 선생이 자손에게 훈계한 시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모양이 단정하면 그림자 어찌 구부러지며
근원이 깨끗하면 물 흐름도 맑을 것을
몸을 닦고 또 집을 잘 다스리면
어느 물건이 정성에서 나오지 않으리
거칠고 음란하면 본성이 없어지고
망녕되게 움직이면 근본 정신을 상하는 것
스스로 자기 몸 깎지 말도록 경계하노니
뿌리를 깎으면 나무가 무성치 못할 것을
잠자고 자리 편안한 곳에서도 유념하여라
천명은 뚜렷이 밝은 것이니
어찌하여 소홀히 할까 보냐
내 몸이 여기서 낳았는데
혹시라도 이 몸을 아무렇게나 다루면
새나 짐승의 성정과 같이 되리니
아아! 내 자손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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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시는 오언율시의 해석으로 한산 이씨 진사공파 계보(1980)에서 발췌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