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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님에 이삭줍기

오드리튜튜 2007. 10. 31. 02:01


앞서거니 뒷서거니 풀잎에 가을 듣는 날
바인더가 흘려버린 벼이삭을 줍는다
기계를 믿은 어리석음의 흔적을 줍는다
맨손으로 먹이를 집어먹던 날부터
숟가락 혹은 젓가락으로 식사를 하는
오늘까지의 거리는 손바닥과 손등의
그저 거기서 거기까지일 뿐
원시채집경제는 아직도 흙에 살아 있고
벼이삭 줍는 뜻은 목숨의 노래
이삭 하나에서 한 계절이 열린다
이슬이 발목 적시고
달콤한 바람 불던 날 아침의
들길에서 만난 김씨와 나누는 인사는
원시보다 낮은 곳에서
문명보다 높은 곳으로 소리없이
와닿는 곡식들의 키를 짐작하는
들새들 눈매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인데
이삭 하나에서 한 시대가 보인다
오지그릇 장수였다던 고조할아버지
짚세기 자욱마다 괴어 있는
사람 아래 사람들 목이 진 눈물이
떨리며 숨어 삭아 어룽진 거,
참봉댁 머슴이었던 증조할아버지
거덜난 삶의 팍팍한 황톳길
낮도 밤 같은 한평생 주름살이
무잠뱅이 기운 자욱으로 드러나는 거,
일제 때 징용 가서 객사한
빈혈 묻은 할아버지의 조국 하늘과
6^256^25 때 탄알 지고 가다 행방불명된
울 아버지 검정고무신에 흥건하게
괴어 있을 피냄새에 엉겨붙는 파리떼
파리떼처럼 그날 그날의 높이를
날아보다 사라지는 하루살이 같은 거,
월남땅 정글에서 전사한 큰형의 그
비폭력 논리가 방위세로 부정되는 것과
중동땅 어느 모래펄에서
산소용접기를 손에 쥔 채 죽었다는
작은형 적금통장에 쓸쓸하게 남아 있는
빈 공간 같은 거
이삭 하나에서 이상기류가 흐른다
들바람이 농약 냄새에 시들고
열어놓고 살던 사립문 뜯어낸 그 자리
철문 달아 굳게 닫은 채 이웃 사람들
빚더미 위에서 의료보험카드를
그리워한다
씨 뿌리는 사람들 단속하는 문서들과
말 잘 듣는 사람들 다스리는 구호들이
피임약을 팔고 냉장고를 팔며
곡식값을 주무르고 대학은 자꾸
인가되는데 자꾸 높아지는데
거친 손바닥에 앙금진 노동은
목타는 침묵일 뿐 술이 취하면
논값과 서울의 아파트값을 자꾸
견주어보며 깊어지는 막소주의 유혹
그래도 그냥은 죽을 수 없는 까닭이 있어
지난 여름 병든 들녘 바라보며 흘리던
땀의 이름을 씹으며 씹으며,
입 없는 농투산이 처진 어깨로 지고
가는 국제적인 무게의 채무를 생각하며,
아이들 키보다 빨리 자라는
이자의 속도를 생각하며,
컬러로 꾸며진 정책에 가리워져
아직도 흙 속에서 영양분을 빨다가
흙 속에 묻히는 20세기 문명을 생각하며,
기계의 시꺼먼 이빨자욱마다
짓무른 생존의 살냄새가
가마니로 포장되어 팔려가는 이 시대,
이 시대의 구석지고 메마른 땅에서
오늘도 허리 굽혀 이삭을 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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