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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규님의 사랑에게

사랑에게 바람으로 지나가는 사랑을 보았네 언덕의 미루나무 잎이 온 몸으로 흔들릴 때 사랑이여 그런 바람이었으면 하네 붙들려고 가까이서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만 떠돌려 하네 젖은 사랑의 잔잔한 물결 마음 바닥까지 다 퍼내어 비우기도 하고 스치는 작은 풀꽃 하나 흔들리게도 하면서 사랑이여 흔적 없는 바람이었으면 하네

좋은 글 2012.09.12

박성룡님의 바람 부는 날

바람 부는 날 오늘따라 바람이 저렇게 쉴새없이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희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풀잎에 나뭇가지에 들길에 마을에 가을날 잎들이 말갛게 쓸리듯이 나는 오늘 그렇게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희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아 지금 바람이 저렇게 못견디게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또 내가 내게 없는 모든 것을 깨닫고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좋은 글 2012.09.01

김송배님에 바람

바람 멀리서 쓰러진다. 누군가 마른 풀씨만 씹다가 썩지 않은 마음 한쪽 남겨놓고 한 생의 막을 내리는가. 하늘이 엷게 흔들린다. 흔들리는 저 언저리 시린 시야 밖으로 돌아가 눕는 저녁 새떼 바람만 빗살고운 무늬로 어른거린다. 오늘밤 귀에 젖은 물소리는 밤의 중심으로 흐르고 홀로 잠들지 못하는 섬 하나 거기에 나는 그리움처럼 남아 있다.

좋은 글 2012.08.31

이기반님의 산 넘어 저 노을이

산 넘어 저 노을이 하늘에 뜬 바다 빠알갛게 속 태우다 살갗도 노오랗께 에이다가 하이얗게 아픔을 쓸어낸 그 자리 누구도 열지 못한 시원의 우주인가. 머나먼 수평에 뜬 씨줄 날줄을 청실 홍실로 엮는 뜨거운 시의 가슴이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순정을 앓다가 끝내는 벗어 보인 알몸같은 것. 무변의 공간 그득히 출렁이는 베토벤의 음정마저 신비의 층계를 오르내릴 때 산산이 부서지는 심장의 파편들이 저승으로 침몰하는가 이승으로 부상하는가 하늘에 뜬 바다 산 넘어 저 노을이 오늘을 살라 먹고 내일을 잉태하는 그 머나먼 나라 하이얗게 개벽하는 꿈밭에 꼬옥 둘이서만 태어나고 싶다.

좋은 글 2012.08.31

이우석님에 휘파람

휘파람 나는 늘 휘파람을 불면서 입을 오무리고 걷는다. 오무린 입속에 봄 바람이 일어 버들개지가 푸릇 푸릇 싹을 띄운다. 휘파람은 늘 입속에서 버들개지의 대롱을 타고 밖으로 나온다. 나와 흡사한 사람을 나는 가끔 본다. 파밭을 지나면서 그것은 오히려 더욱 싱싱히 파잎을 타고 나오는 닐리리 닐리리 소리. 검은 커튼을 드리우고 깊이 방에 묻혀 있는 날 봄 볕을 타고 흐트러지는 수많은 피리 소리를 들으면서 나의 휘파람은 입속에 있는 가장 가벼운 침방울을 흔들어 홀홀 날려 보내는 일상인 것이다.

좋은 글 2012.08.20